당신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요즘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예, 고시생인 주제에 무슨 잡생각이냐, 그럴 시간 있으면 IS-LM 곡선이나 한 번 더 그려라,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요새의 저로서는, 조금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아마도… 창사마(아, 저희 과 선배 별명입니다. 모 당 총재 아님.)가 함께 했던 모임이니 2005년이었을 겁니다. 제 1차 교육과정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교수요목기는 제외.) 사회과 교과서가 어떻게 변화해왔고(형식이라든가 진술내용이라든가) 교육은, 그리고 정치는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에 대한 세미나였죠. 그러고 보니 1차 교육과정 책을 구하느라 생판 처음 뵙는 사학과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어렵사리 복사본을 구해온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책이 오래 돼놔서 잘못 건드리면 문자 그대로 날아갈 듯 했…)

뭐, 이승만박사시절부터 해서 박소령 찍고 연희동 29만원 거쳐 보통 사람까지의 교과서 진술이야 뻔한 이야기일테고 이방호가 낙선한 게 너무 기쁜 정치 9단 YS시대의 출범과 비슷한 시기에 출판되었던 교과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정확한 진술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앞으로의 시대에 대한 부푼 기대와 희망이었습죠. : 그 기대가 IMF로 박살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주제는 무거웠지만 결론은 심플했습니다. 교과서는 급변하는 사회의 욕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제작시기가 점차 빨라지고 있으며 정권의 특성에 따라 김주석의  위인전을 방불케 하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는 이야기죠. : 5.16은 혁명, 이 따위 소리가 떡하니 써있다거나요.

몇 회에 걸쳐 진행되었던 세미나의 종국에 저희는 자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그 시기에 교단에 서있었더라면 당당히 현실을 고발할 수 있었겠는가.

술김에 박장군이 족제비를 닮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남산으로 끌려가던, 가슴에 품은 타는 마음을 신새벽 뒷골목에 떨리는 손으로 써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교단에 섰더라면 나는 정말로 '이 정권은 쿠데타로 수립된 것이고 이 땅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 평생 은사로 삼은 분을 만났고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나는 앞으로 선생님이 되겠노라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길은 쳐다도 안 본 거 같군요. 가슴으로 원하고 또 원하던 길, 가르치고 배움을 평생 업으로 삼는 그 길에 겨우 올라섰는데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도 현실은 독재임을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차마 '나는 남산으로 끌려갈 지언정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 되겠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와 내 가족의 안위도 소중한 것이니까요.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학우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더군요. 예, 그 때 거리로 뛰쳐나갔던 이들이 보기에 저희는 비겁자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점은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가정이라고 해도 제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우주신도 될 수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학생들 앞에서 현실이 잘못되었노라고 이야기하지는 못하더라도 교사라는 이름으로 서서 그들에게 국민교육헌장을 외게 하고 북한사람은 뿔달린 괴물이며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는 너무나도 훌륭한 구국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할 수조차 없는 나약한 룸펜임을 말입니다. 그 룸펜들의 결론은 사직이었습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채우고 내가 피할 수 밖에 없었던 그 행위를 반복하겠지만…

'우리는 그냥 단체로 사표 쓰고 나와서 쌀집이나 꾸려야겠다.'고 허허 웃어버렸습니다. 그날의 주(酒)님은 참 썼던 것 같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저희는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 테니까 참 다행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네요. 그런데… 이런 기사라든가 이런 기사가 나오는 걸 보니 그런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또 없는 거 같군요.

교육공무원은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중립성을 지녀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죠. 애초에 공무원의 지위를 법으로 공고히 한 것도(요새는 소리소문 없이 자르기도 하더라마는) 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정치하는 사람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아양 떨 생각 하지 말고 걔들이 뭘 하든 네 놈 밥줄 끊길 일은 없으니 네 할 일이나 잘 하라라는 뜻에서 나온 거니까요.

탁 까놓고 말해서… 정치적 중립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까? 모른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죠. 딱히 이해가 갈 거 같진 않지만 말이죠.

정부가 A라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교사가 A라는 정책에 반대한다고 교실에서 이야기합니다. 이건 정치적 중립에 위배되는 거죠. 그럼 상황을 바꿔서 교사가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A에 대해 찬성한다고 교실에서 이야기합니다. 이건 어떤가요? 조낸 중립적입니까?

중립(中立)
[명사]
1.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함.
2. 국가 사이의 분쟁이나 전쟁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중간 입장을 지킴.
-출처 : 엠파스 국어 사전-

당신이 중립적인 교사라면 학생이 무슨 결정을 내렸든 그것이 외압에 의한, 또는 트랜스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그건 존중받아야 마땅한 겁니다.(촘스키할배도 그랬잖습니까, 그가 옳은 말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그가 무슨 사람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애가 합리적인 사고를 거쳐 쇠고기 수입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거리로 나가는 걸 막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쇠고기 수입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가치 또한 보호해줘야 한다는 거죠.

다만 아이가 집회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올바른 집회참여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있겠죠. : 분위기가 과열되면 충돌의 위험이 있으니 깃돌이들 따라다니지 말라든가 폴리스라인 넘지 말라든가… (왜, 배려가 있는 주장 그 공익광고 있잖습니까.) 시간 되시면 Kelly나 Hawood의 교사유형과 바람직한 교사상을 참고하시길.

사회과 교육의 대부 Banks할배는 사회과 교육의 목표를 지식, 기능, 가치태도, 시민행동의 4개 범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면 사회문제를 알고(지식) 탐구할 줄 알고(기능) 스스로 가치를 결정했으면(가치태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시민행동)는 겁니다. 그런 데 나갈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 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곧 학습이라는 거죠.

당신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 서서 '집회 나가면 점수 깎을 거야, 그래도 안 들어? 걸리기만 해, 정학 먹을 줄 알아.', '문자메시지 확인할 테니 보여줘.', '시끄럽고 공부나 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애들 학습권까지 박탈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은 파란 기와집에 앉은 그 분이나 관료가 아니라 학생들이라는 거요.
by hideyuki | 2008/05/17 10:35 | 談話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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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음헬헬 at 2008/05/17 12:03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일부 교사들이 자신이 교사라는 자각을 가지고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전부터 쭉~~(점점커집니다 그려.. ㅜ.ㅜ)
Commented by hideyuki at 2008/05/17 20:25
음헬헬 님 : 우리나라의 교육목표는 홍익인간이고 저희 사회과의 교과목표는 민주시민의 자질을 육성하는 데 있답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시민행동을 통해 국민건강권을 보호하고 검역주권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교육목표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수행평가를 들여온 것도 학생이 해당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 수 있는지 평가하기 위함이었는데 정학을 때리는 것보다 높은 점수를 줘야 맞는 게 아닐까요? OTL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이중잣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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